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는 것(삿 19:13)
(삿 19:13)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레위인이 첩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간다. 출발이 늦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해가 저문다. 가까운 마을에 들어가 유숙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동행하는 종이 제안을 한다. 가까이에 여부스(예루살렘)가 있으니 그곳에 유숙하자는 것이다. 당시에는 여부스에는 베냐민 지파와 가나안 원주민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삿1:21). 그래서 나름 그곳에 유숙하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다.
레위인은 여부스에서 유숙하기를 거절한다. 그곳은 이방인의 마을이니 다른 마을에 들어가자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환대의 문화를 기대한 것이다. 대신 조금 더 가서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서 유숙하자는 것이다. 섞여 사는 곳이 아니라 동족만 사는 곳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전’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위인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앞장서서 섬기는 사람이다. 그는 한 노인을 만났을 때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 자신을 소개한다(18절). 그는 말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이율배반적이다. 율법이 금한 첩을 두었다. 첩을 둘 정도로 부를 축적했다. 분명히 레위인으로서는 일반적이지 않다. 사회만이 아니라 종교도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여정도 불확실하게 말한다. 첩이 행음하고 집을 나가서 찾으러 갔다. 어떻게 첩을 데려오는가. 첩에게 좋은 말만 한다. 두 번 다시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다짐을 하거나 어떤 처리가 없다. 그냥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레위인으로서 하나님 말씀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자신에게는 관대히 적용하고 이웃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레위인은 왜 불안해하는가? 누구보다 하나님의 든든한 후원을 받는 사람이 아닌가. 유숙할 곳을 찾을 때 동족만 사는 곳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이 죄를 행하며 사니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사회가 죄인들로 가득해서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도 적어도 같은 신앙을 가진 동족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은 모든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이다.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이 사라지고 각자 자신이 주인이 되었다. 자기 이익과 필요를 위한 선택을 한다. 율법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해도 자신과 이해관계가 있으면 쉽게 율법을 포기하는 것이다. 레위인의 이런 행동을 보면 그 당시 사회 전반이 죄로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사회가 불안하고 죄가 가득하면 의인들은 숨게 되어 있다. 악한 자들이 득세함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급박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잘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느냐, 신뢰하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대화에는 하나님이 항상 등장하지만, 마음으로는 섬기지 않는 것이다.
신앙의 모양, 경건한 모습은 있으나 믿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다시 나 자신부터 점검한다. 나는 무엇을 믿는 사람인가?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 않은가.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거리낌이 있거나 죄를 깨달았을 때 주저하지 않고 회개하고 단호하게 끊어내기를 소망한다. 입술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내 삶 전부를 맡기는 신앙인이 되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