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높아지기 원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류 조상 아담의 죄명이기도 하다.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했다.
사탄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참으로 높아지는 길이 있는가?
본문의 ‘이러므로’는 앞의 내용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이러므로’가 있어야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6-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발적으로 비우셨다.
낮아지셨다.
권리를 포기하셨다.
죽기까지 내어 주셨다.
철저한 순종을 하셨다.
우리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높이셨다.
높아지는 길은 먼저 낮아지는 것이다.
자신을 비우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다.
내 생각 대신에 하나님의 생각을 채우는 것이다.
말씀을 채우는 것이다.
주신 말씀대로 복종하는 것이다.
성도의 삶은 역설적이다.
낮아지고 비울 때 높아질 수 있고 채워진다.
조심할 것을 높아질 것을 기대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급부를 보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고 내어 주는 것이다.
주님도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다.
아버지와의 단절을 경험하셨다.
기대하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 아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셨다.
하나님의 높이심을 ‘지극히’ 높이심이다.
최고로 높이심이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생각게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죽어 마땅한 우리를 살리셨다.
영생의 복을 주셨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높여주신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바닥에서 살고 있을 우리들이다.
소망 없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 썩어질 것에 다투며 살았을 우리들이다.
그런 우리들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셨다.
영적인 안목을 열어주셨다.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해 주셨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게 하셨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를 신뢰하고 믿음을 고백한 우리들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만으로도 충분한데
우리들은 여전히 이 땅의 필요를 찾아 헤매고 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를 다듬고
예수님을 높이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면서 오늘을 기대한다.
하나님의 손길이 나의 생활 중에 선명하게 드러나길 기도한다.
그 은혜 힘입어 스스로 겸손하게 하나님 뜻을 따라 살기 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