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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덜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요한계시록에 대한 첫 느낌은 두려움이다. 잘못 읽고 해석했다가는 큰 오해를 일으킬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섣부르게 요한계시록을 잘 말하지 않는다. 가급적 무난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주로 다룬다. 하지만 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은혜와 교훈은 무궁무진하다. 두려움을 내려놓고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읽어가고자 해야 한다.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시자 재앙이 시작되고 심판이 시작된다. 어린 양의 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봉인한 봉인을 떼는 것이다. 두루마리는 구원의 책이다. 그런데 그 책의 봉인을 하나씩 뗄 때 심판이 시작된다. 구원의 책인데 왜 심판을 말할까. 심판이 진행됨으로 악한 자들이 벌을 받고, 선이 드러나게 된다. 즉 심판은 동시에 구원을 말한다.

첫째부터 넷째까지 인을 뗄 때마다 흰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나온다. 전쟁과 기근과 다툼, 죽음 등으로 심판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순교를 당한 사람들은 피 값을 갚아 주길 간구한다. 여섯째 인을 떼자, 우주적 재앙이 임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위로부터 시작된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부터 심판하신다.

힘 있는 권세가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악을 행했다. 악한 일은 꼭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 종으로 협력하고 자유인으로 협력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힘을 가지고 악을 행한 사람과 그 일에 부역한 사람들을 제일 먼저 심판하신다. 그들은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서 어린 양의 진노를 보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불가능한 요청이다.

마지막 날 심판의 주님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임하신다. 특히 악을 행한 사람들을 선명하게 그것을 보기에 심판의 주님을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리는 진노의 잔을 받기보다는 산들과 바위가 자신들을 덮쳐서 어린 양의 진노를 보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우면 이런 표현을 하겠는가. 어린 양의 진노의 날은 어마어마한 날임이 분명하다.

교회를 핍박하던 세상은 무너지고, 성도의 정당성이 입증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면 그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믿고 그 구속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이 믿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담력을 주신다.

성도는 무엇을 사는가 생각한다. 우리의 힘과 능력이나 잘 갖추어진 조건이 아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 가는 신앙생활이 아니다. 먼저는 복음이며, 십자가 은혜이다. 조건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하나님 자녀답게 살게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니 마음에 힘이 난다. 세상의 강력한 세파가 흔들어도 굴복하지 않을 이유가 분명하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며,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날마다 십자가 은혜를 붙잡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기도한다. 심판의 날, 오히려 하나님을 더 찬양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