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2: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쳤을 때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 다가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긴다. 유다는 혼자 예수님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는 유월절 만찬상에서 조용히 빠져나가 예수님을 팔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직접 넘겨주기 위해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군인들을 데리고 찾아온 것이다.
입맞춤으로 인자를 팔아넘길 때 주변에 군인들이 체포하고자 한다. 그때 곁에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한다. “주님,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주님이 전에 칼을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지금이 그 칼로 싸울 때입니까? 질문한 것이다. 무슨 이유로 칼을 준비하라고 했는지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는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오해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칼을 가지라고 한 것이었다.
항상 말보다 행동이 앞섰던 사람이 있다. 베드로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칼을 빼서 곁에 서 있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그때 주님은 칼을 넣게 하시고, 칼로 일어선 사람은 칼로 망하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상처를 입어 고통스러워하는 종의 귀를 만져주시고,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아라.”라고 하셨다. 분명히 불의한 사람들이며, 불의한 방법으로 죄 없는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이지만 싸우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 생각은 싸워야 할 것 같고, 준비한 칼을 써야 할 때로 보인다. 하나님 생각과 다른 것이다. 대신 참고 인내하라고 하신다. 인내로 시험을 견디어내라고 하신다. 인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받아 누리게 한다(히 10:30).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분명하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칼을 사용할 때로 보이지만, 주님은 칼을 넣으라고 하신다. 피곤해서 잠을 잘 때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다.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이렇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중세의 신학자 어거스틴은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성채와 같다”고 하였다. 우리 영혼을 가장 잘 보호하고 잘 지키는 방법은 기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담게 한다. 우리 자신을 살피어 나를 변화와 성숙으로 나아가게 한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이며 생명이다.
깨어 기도해야 할 때 잠을 잤던 제자들은 급박한 상황이 펼쳐졌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당황했다. 베드로는 자기 생각을 따라 우발적 행동을 하며 넘어졌다. 깨어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도는 내 생각과 뜻을 하나님께 전달하고 통보하는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다. 기도해서 땀방울이 나기도 쉽지 않은데, 얼마나 온 힘을 쏟아부어 기도했으면 땀방울에 핏방울이 섞여 나올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찾기에 얼마나 전심으로 기도했는지, 자기 생각과 다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기 위해 몸부림을 한 것이다. 간절히 온 힘을 다해 기도할 때 하늘의 천사가 도왔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와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 기도로 사는 사람의 모습이다. 내 안에 기도가 더 풍성해지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