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눅 18:39)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의 절규이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있는 곳을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에 결심했다. 예수님 아니면 자신의 인생에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친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반응을 ‘잠잠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꾸짖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방해하지 말라고 꾸짖는 것이다.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하여 주님을 부른다. ‘잠잠하라’고 말하면 더욱 크게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불렀다.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 물으셨고, 바디매오의 소원대로 ‘보게 해’ 주셨다. 육체의 질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다. 믿음을 보시고 그의 믿음대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예수님을 향한 ‘오직 믿음’을 인정하고 구원의 은혜와 치유의 은혜를 함께 베풀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다. ‘앞서가는 자들’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앞서가는 자’이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열심 있는 사람이다. 먼저 믿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서 섬기는 사람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범적인 신앙인이라고 칭찬받는 사람일 수도 있다. 믿으려면 저렇게 믿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만지심과 은혜를 기대하며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을 제지한다. 꾸지람한다. 무슨 이유일까?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 오해한 것이다. 자신들의 필요와 유익에는 관심이 있지만 이웃의 필요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시선을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향하게 한다. 먼저는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길 소망하며 다듬어야 한다. 그런데 그 시선이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으면 이기적으로 될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나보다 더 연약한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좋은 열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강력한 방해와 반대를 맞이하기도 한다. 예수님처럼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될 수도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원하는 세상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하신다. 내 안의 자아는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숨 쉬게 하라 하신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잊지 않기를 기도한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한다. 나의 성품과 생활에 주님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길 소망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성도답게 살아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되길 기도한다.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 형상의 아름다움이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는 사랑으로 표현되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