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3: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주가 오실 길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굽은 길은 반듯하게 하고 움푹 팬 길은 메우고, 돌부리가 있는 곳은 뽑아내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굽은 길을 반듯하게 펴는 것은 무엇일까? 이웃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기준과 선입견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바라보며 살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건은 거듭남이다. 거듭남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먼저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살면 망할 것이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깨달음, 자각이 있어야 회개가 나온다. 회개한 사람답게 죄를 미워하고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진리를 선포하고 복음을 외치면 깨닫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칠 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찔림이 있었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 요한에게 나아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한 것이다.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아온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은 외친다. “독사의 자식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라.” 그때 무리가 묻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답이다.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라는 것이다. 옷 두 벌이 있는 자는 옷이 없는 자에게 나눠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다.
옷 두 벌이라고 할 때 여기에 옷은 속옷이다. 겉옷과 비교할 때 속옷은 최소한의 필요이다. 그런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을 돌아보라 하신다. 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당장 누군가 먹을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굶을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먹을 것을 제공하라 하신다. 너만 살 궁리를 하지 말고 함께 살 궁리를 하라는 것이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부자가 아니다. ‘무리’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런데 한 벌밖에 없는 사람에게 가진 것마저 내놓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옷 두 벌이 있는 사람은 한 벌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입고 있는 것 외 다른 한 벌을 나누라는 것이다. 먹을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먹을 것 있는데 먹을 것 없는 사람을 보면 내 것을 떼어서 나누라는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은 나누는 삶이다. 나누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일용할 양식도 주시고, 먹이고 입히시고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 노력과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불어 살기를 원하신다. 함께 사는 것이다. 시선을 나에게서 이웃으로, 공동체에 두어야 한다. 건강한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회이다.
조금 따뜻해졌지만, 혹한에 눈이 내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이른 새벽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제설작업을 하며 섬기는 분들이다. 출근길에 그들이 있기에 안전 운행을 한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제 역할을 감당하며 이웃을 배려할 때, 즉 수고와 섬김으로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오늘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돌아본다. 가족과 사회,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내 것을 포기하고 나눌 것을 나누며 살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