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았다. 복음의 본질을 분명하게 이해했고, 그 이해를 삶으로 표현했다. 복음이 지식에 머물지 않고 가슴을 울리고, 손발을 움직이게 했다. 욥바라는 항구에 사는 한 여자 제자를 소개한다. 다비라는 여인이다. 제자라는 이름을 얻은 것을 보면 말씀대로 살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썼다는 말은 없다.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며, 주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 적어도 다비다 역시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선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복음 선포의 방식은 선행과 구제였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되, 심히 많이 하던 여인이다.
어떻게 선행과 구제해야 심히 많이 하는 것일까. 그것도 자기 혼자만 많이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베드로가 다비다를 위해 방문했을 때 그곳에 있었던 모든 과부가 울면서 말했다. 자신들이 다비다가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였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살려달라고 간청했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작은 선행부터 실천한 것이다. 선행과 구제는 이웃사랑의 표현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주님의 마음이며,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삶은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다비다는 떠난 자리에 아름다운 사랑의 흔적을 남겼다. 그러니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지 않고 씻어 다락방에 모시고, 베드로를 부른 것이다.
‘심히 많았다’는 표현은 선행과 구제가 자기 적성에 맞았고, 재미있게, 기쁘게 그 일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손으로 겉옷과 속옷을 만들어서 제공했다. 분명히 이 옷을 제공할 때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도 전했을 것이다. 그녀가 이런 삶을 살게 된 이유는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면서 이웃사랑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사랑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요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증표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드러나야 할 것은 이웃사랑이다. 그 증거인 선행과 구제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일어나는 내면의 탐욕을 본다. 탐욕의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제자는 그 탐욕을 내려놓는 사람이다.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선언했고, 나를 쳐 복종시킨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자아가 살고, 이기적인 판단과 생각이 수시로 내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도 싸워할 것이다.
나는 주님의 제자인가? 제자라면 내가 떠난 후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을 무엇일까? 다비다처럼 심히 많은 것, 나의 모든 것을 집중하여 마음껏 헌신하는 일이 무엇인가? 주님 걸으신 것처럼, 그리고 제자들이 걸었던 것처럼 사랑의 흔적만 남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흔적들만 남기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