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0: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맹인이며 구걸하며 먹고 사는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시는 소리를 듣고 부르짖는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한다. 사람들이 방해하고 ‘잠잠하라’ 제지해도 멈추지 않는다.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른다. 어떤 방해가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꼭 만나길 원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보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신다. ‘잠잠하라’ 책망하던 사람들도 ‘안심하고 일어나라 주님이 부르신다.’라고 말한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삶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다. 방해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 생명의 길인 줄 아는데도 다른 일들 때문에 주저앉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가 발견하고 걸어가기를 원하는 길은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사탄이 다양한 장애물을 가지고 방해한다. 일상의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넘어지게 한다. 우리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믿음의 길을 따라갈 때 어떤 방해와 장애물을 만나도 바디매오처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나아가면서 자기 겉옷을 내버리고 나아갔다. 당시 겉옷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겉옷을 입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형편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겉옷을 벗어버리고 나아갔다. 있는 모습 그대로, 외적 포장을 벗어버리고 나아갔다는 뜻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벗어버린 것은 예수님에게 그 무엇도 감출 수 없음을 알았다는 뜻이다.
겉옷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잠을 잘 때 이불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생존에 정말 필요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겉옷을 내버린 것은 자신이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외적인 조건, 자신이 가진 것,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을 벗어버린 것이다. 그는 예수님만 붙잡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이 붙잡고 있던 것을 내버리고 나아간 것이다.
예수님이 부르실 때 바디매오는 뛰어 일어나 나아갔다. 벌떡 일어나 나갔다는 뜻이다.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나아갔다. 예수님이 이름을 불러주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불러주신 것이다. 그러니 머물고 있던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박차고 일어나 나아갔다. 마치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사람이 자기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보다 더 큰 기쁨일 것이다. 바디매오는 기쁨으로 자기 삶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아갔다.
요즘은 신앙생활을 해도 자기 영역을 지키려고 한다. 자기 영역이 없어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기만의 테두리를 만들고 그것이 무너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함께 신앙 생활하는 믿음의 형제자매에게도 자기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모든 것을 내버리고 따르는 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일부분 따로 떼어 놓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내버리는 것이 전적 신뢰이다.
주님을 어떤 모습으로 따르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본다. 내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는 모습 그대로 기쁨으로 주 앞에 나아가고 있는가? 아직 버리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내려놓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내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주고, 나만의 울타리를 만들어 사람을 선별하고, 배타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에게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음을 기억하며 포장한 모든 겉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