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예수님은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높은 산에 올라가신다. 주님 나름의 교육할 부분이 있기에 특별히 구별하여 세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신다. 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인자’ 구절이 나온다. ‘인자’ 구절은 항상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함께 등장한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수난에 대해 구별하신 제자들에게 좀 더 깊이 가르쳐 주시기 원했던 것이다.
제자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다. 예수님이 ‘변형’(2절) 되시고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났을 때 제자들의 관심은 화려하고 광채 나는 것에 집중한다. 베드로는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한다. 머물기 위해 초막을 짓자고 제안한다. 그들의 관심사와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드러낸 것이다.
제자들의 시선이 찬란하고 화려한 것에 집중하니 위에서 구름이 내려온다(7절). 그리고 모든 것을 덮어 버린다. 이제는 찬란한 광채가 아니라 소리가 들려온다(7절). 멀티미디어가 아니라 오디오 매체로만 다가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들어야 할 것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겉모습이 화려하고 멋있는 것에 관심을 빼앗기곤 한다. 은근히 그런 자리에 서기를 원한다. 이런 속마음 아시는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 임하신다. 아무도 보이지 않게 구름을 덮으신다. 그리고 음성만 들려주셨다.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 말씀만 듣고 따르라고 하신다. 복잡하지 않고 너무 단순하다. 쉽다.
우리가 가는 길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우리의 마음이 복잡한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 되지 않고 분산되기 때문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산만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과 생각을 하나로 모은 것이 신앙의 훈련이다. 훈련되어야 십자가의 길이 보이고, 기쁨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사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교회 여러 가지 사역을 결정하는데도 복잡하고 여러 갈래의 길이 보일 때 시선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인자, 주님’이 가신 길이다. 폼나고 멋있고 화려한 곳이 아니라 좀 더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이 부르시는 길을 가는 것이다.
내 생각과 말을 품고 가는 길이 아니다. 들려주신 음성을 마음에 새기고 가는 길이다. 하나님이 그의 말,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고 한다. 세상의 소리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가치와 믿음의 가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기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주님이 걸으신 것처럼 섬기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십자가의 길은 결코 영광의 길이 아니다. 힘들고 때로는 나의 가장 소중한 것도 내 주어야 한다. 이 길을 걸으며 우리의 관심을 집중한 것은 하늘의 음성, 주님의 음성이다. 화려한 겉모습에 흔들리지 않고 수수해도 다듬어지고 성숙한 내면을 사모해야 한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내면, 속사람을 가꾸는 일이다. 오늘도 주님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며 주님처럼 살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