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욥 24:1)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욥은 어찌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이 때를 정해 놓지 아니했는가 반문한다. ‘때’는 단순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때이다.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들을 속히 심판하지 않으시는지 반문하는 것이다. 심판하실 때가 되었는데 왜 심판하지 않으시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를 정하시고, 그때를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이상하다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도록 악한 사람들의 실상을 고발한다. 빨리 악한 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심판해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당시 권세가 있고 힘이 있는 사람들이 약한 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며 악을 행하였다. 그래서 성안에 신음 소리가 가득하고 학대받는 자들이 스스로 숨는다는 것이다. 약한 자들이 숨을 죽이며 스스로 숨는 것은 그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는 증거이다. 약한 자들이 인간답게, 자신의 권리를 누리며 사는 사회가 정직한 사회, 행복한 복지사회이다.

세상은 갈수록 어려운 사람들은 더 어렵고, 잘 사는 사람들은 더 잘 사는 것 같다. 빈익빈 부익부는 느낌일까? 욥의 고발이 오늘 우리 사회를 향한 고발과 같다.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욥 24:12) 정말 하나님은 못 본 척하고 계시는 것일까? 하나님의 침묵이 힘들게 느껴지는 때이다. 돈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악행을 덮으려고 한다. 은밀한 중에 행한 일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욥의 가장 큰 아픔은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억울한 사람들의 참상을 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는 환경인데, 하나님이 아니면 소망이 없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분명히 보고 계실 텐데 왜 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공의, 살아계심, 신실하심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악한 자를 심판하실 때는 늦추지 말고 빨리 심판하여 약한 자들을 살려달라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고민도 비슷하다. 믿음 없이 악하게 사는데 더 잘되고 형통한 사람들이 있다.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형통한다. 의인은 단명하고 오히려 악한 자들이 장수한다. 악한 자들이 이 땅에서 평안한 삶을 산다. 말씀대로라면 이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공의를 세우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보인다. 매일 들려오는 나라 안팎의 소식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게 한다. 욥과 같은 고민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다.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들의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된다. 오히려 그 믿음이 이 땅 위에 굳게 세워지도록 간구해야 한다.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이 확실히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간구하자. 하나님의 통치권이 개인의 삶과 나라의 역사와 세상의 역사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간구하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세상만사를 지탱해 가시는 주관자이시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생각을 내려놓자.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 나라가 내 삶에 먼저 임하도록 마음의 보좌를 내어 드리자. 조용히 기도한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