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23:3-5)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욥은 자신을 정죄하는 엘리바스를 공격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아뢴다. 하나님을 만나 뵙기를 소망한다. ‘어찌하면’이란 표현을 보면 그의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욥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 믿음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침묵이 느껴진 것이다. 기도를 드려도 응답이 없고, 자신의 환경은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다. 오히려 고난이 극심하여 자신의 탄식보다 더 무겁고 크다고 고백한다.(2절) 자신이 하나님을 뵙기를 원하지만 만나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이제까지 경험하고 가진 신앙적 이해는 소용없는 지식처럼 느껴진다.
신앙의 위기이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때이다. 그런데 이 터널이 언제 끝날지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생각은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지고, 홀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다는 것이 큰 아픔이다. 욥처럼 믿음의 본을 보이는 사람도 어둠의 터널이 있다.
하나님의 침묵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의 터널이다. 욥도 고백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순금같이 되는 길이 있는데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 철을 포함한 잡석이 용광로에서 철저하게 형태도 없이 물과 같이 녹아져서 제련되고 또 제련되어 순수한 철로 나오는 것이다. 뜨거운 용광로를 통과하면서 견고하게 쓰일 수 있는 철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어둠을 통과하고 순전한 신앙으로 정련되는 과정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주권적인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일정하다.(13절) 변함없으시다. 그 누구도 그 뜻을 돌이킬 수 없다. 그 마음에 정하신 것을 틀림없이 이루어 가신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서면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움직일 수 없는 분이시다. 만약 우리가 무슨 종교적 행위를 하고, 예쁜 행동을 하여 신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내가 요청한다고 하여 다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찾아오셔야 만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의 기도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시는데 기도할 필요도 없는 것인가?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하시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우리를 향한 계획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들의 노력과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하나님의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문제는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은 기도로 나타난다. 욥도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결국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만나길 기대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소망을 아뢰어야 한다. 그 소망이 구체화 되고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다. 나의 간절한 소망은 무엇인가? 하나님인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인가. 욥을 통해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면 점검한다. 오직 나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은 성품이 인격에 묻어나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