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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22:11)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욥에게 세 번째 권면을 하는 엘리바스의 이야기이다. 엘리바스는 세 번째 권면에서는 더 강하게 접근한다. 욥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둠이 홍수처럼 덮어서 전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을 죄인이라고 전제한다. 그것도 큰 죄인, 끝이 없는 죄를 진 사람으로 묘사한다. (5절)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전제가 매우 중요하다. 일단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전제하면 하는 일들이 다 죄로 보인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라고 전제하면 죄를 짓는 행위도 안타깝게 보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전제는 매우 중요하다. 엘리바스는 나타난 결과를 통해 욥을 죄인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욥이 반복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이성이 어둠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제를 선입견이라고도 말한다. 선입견이 있으면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 없다. 자꾸 개인적인 생각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엘리바스도 욥이 죄인이라고 전제하니 욥이 하는 말들은 구차한 변명으로 들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욥이 부자였던 시절 행했을 법한 일들을 생각하며 고발한다. 추측을 통한 고발이다. 욥의 입술을 통해 전해 들은 내용이 아니다. 욥의 행동을 직접 목격하고 하는 고발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들이다.

부자로서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힘없는 자들의 권리를 착취하며,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돕지 않고 매정하게 대했다고 정죄한다. 부자들에게 있을 법한 일반적인 죄들이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면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다. 이해의 틀이 내 기준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세계가 이해의 중요한 기준이 되면 실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경험한 세계보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더 넓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웃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겉으로 드러난 행동도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알 수 없기에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없다. 한쪽만 보고 판단하는 절름발이 이해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는 불변의 진리에 기초해야 한다. 성도에게 불변의 진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다. 말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이해하며 성도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

타산지석이라고 하였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 이웃이 있기에 내가 있고, 이웃이 있기에 내가 바른길을 갈 소망을 갖는다. 관계를 통해 내가 다듬어지는 것이다. 내 생각, 내 방식으로만 살면 안 됨을 배우는 것이다. 이웃들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나를 다듬어 가는 것이다. 여전히 내 생각과 나만의 세계에 갇혀서 이웃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삶은 망하는 길이다. 선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올라가는 것이다.

말씀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면 인간관계와 성도의 삶에 심각한 문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기준이 불분명해지고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연구하며 묵상하자. 묵상은 우리들의 힘이다. 기도의 자원이다. 삶을 다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첫걸음이다. 내 방식대로 살고, 내 방식대로 행동하는 아집을 내려놓을 수 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묵상,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인격으로 다듬어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