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13: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욥은 자신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주장만을 펼치는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지 못한다. 친구들의 인과응보 교리에 관한 주장은 결코 모르는 일이 아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 내용으로 강력하게 압박하는 친구들에게 위로보다는 상처를 받는다. 아무리 자기 속사정을 설명해도 벽창호처럼 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이 가진 이해의 틀을 따라 주장한다.
욥이 친구들의 조언을 들은 후 선택한 것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냥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 앞에서 확인하려 변론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변론이라는 단어는 법적인 용어이다. 시비를 가리는 단계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억울하게 형벌을 받지 않도록 마련된 장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변론조차도 돈으로 해결한다. 돈으로 논리를 세우고, 돈으로 판결을 굽게 한다.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소망이 없는 이유이다. 정의가 있는 듯하지만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보면 굽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세상의 변론도 누가 더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법과 논리가 체계적인 사람과 변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욥이 변론하기 위해 나아간 대상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 우리들의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속의 생각까지 꿰뚫어 보고 계시다. 그런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변론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욥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원한다.
욥은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더 이상 변론을 통해 자신의 결벽을 보증해 줄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변론의 위험성을 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3절에서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말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15절) 고백한다. 그가 설령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고백이다. 이 땅에서 설령 나의 결백이 인정받지 못해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외적 조건이나 행함에 대한 반대급부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욥이다. 계산적인 신앙이 아니다.
우리들의 삶은 여러 면에서 계산적이다. 세상의 논리가 인과응보로 점철되어 있다. 무언가 애쓰고 투자했으면 그에 따른 결과물, 반대급부를 얻어야 한다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의 논리이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이런 세상의 논리를 따라 무언가를 하고 나면 보상을 기대한다. 무엇이 주어지지 않을까? 하나님께 봉사하고 섬기는 것도 대가를 기대한다. 조건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조건적인 신앙으로 믿음 생활을 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따른다는 뜻이다. 내가 기대하는 것, 소망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이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 말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작고 편협한 지식 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령 이 땅에서 보상받지 못해도,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셔도,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길 소망한다. 오늘 나의 믿음을 점검한다. 조건적 신앙에서 무조건적 신앙으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서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