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설명한다. 이 주제는 오해도 많고 공격도 많은 주제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만은 하나님이 너무 독선적이고 무자비하다는 공격이다. 그렇게 행하신 권한이 하나님께 있느냐고 반문한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하나님을 공격한다.
신자들도 때때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불만을 표시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은 고려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하신다는 불만이다. 기도한 것을 응답해 주시지 않고 안 믿는 사람들이 더 잘되게 하신다는 불만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동일할 때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하나님 생각과 다를 때이다. 하나님을 내 생각대로 사용하려 하기에 더 문제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보다 훨씬 높고 뛰어나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하나님의 생각이 높다. 분명히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좋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고백한다. 삶의 현장에서 인정하지 못함이 문제이다. 우리보다 하나님의 선택이 더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불평과 원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뜻을 대적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반문할 수 없다. 가끔 자녀 가운데 부모에게 자신을 왜 이렇게 낳았느냐고 원망할 때가 있다.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고, 유전형질 중 마음에 들지 않는 형질을 부모로 물려받았을 때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선물로 태어났다. 우리는 선물조차도 내가 원하는 선물을 선택하여 받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창조의 핵심 개념은 “다름과 조화”이다. 다양함 속에서도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어떤 그릇이든 주권적으로 만들 수 있다. 다양한 그릇이 조화를 이루고, 필요에 따라 여러 그릇이 쓰인다. 천히 쓰이기도 하고 귀히 쓰이기도 한다. 그릇이 그릇을 만든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천히 쓰이는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원망할 수 없다. 그것은 그릇을 만드는 사람의 주권이다.
토기장의 주권이 있듯 하나님에게도 주권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 항상 하나님을 독재자, 독선으로 가득한 분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자유를 사용하시는 중요한 이유는 독선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함을 통해 조화, 아름다움을 이루시고자 함이다. 멸망이 아니라 구원하고, 더 피폐한 삶이 아니라 행복한 삶에 살게 하고자 함이다. 우리에게 더 풍성한 삶을 보여주고, 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할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오래 참으시고 남은 자를 남겨 두신다. 이에 대해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왜 빨리 심판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고자 함이다.
구원하실 대상을 선택하실 때도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가 적용된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부르시고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서도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 결코 하나님은 주권적 자유를 따라 일하실 때 우리를 멸망시키고자 일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인정하며 살기를 소망한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내 삶을 세밀하게 섭리하여 인도하시는 선한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만나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