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옛 장막은 비유로 주셨다. 이 장막은 성소와 지성소를 포함한 성막, 회막을 가리킨다. 지상의 성소, 처음 장막을 의미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첫 언약 시대를 비유한다.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첫 언약, 율법을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예물과 제사의 한계가 무엇인가? 섬기는 자를 양심까지 온전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육체만 씻을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는 원죄는 해결하지 못한다.
이것은 육체의 예법이다(10절).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다. 참된 것이 올 때까지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다. 개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양심까지, 부패한 본성까지 깨끗하게 하는 구속을 완성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으로 인하여 양심까지 깨끗함을 입었다. 부패한 본성을 내려놓고 거듭난 새로운 본성을 갖게 되었다. 주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주어졌고, 새로운 감각이 생겼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감각이다. 영적 미각이다.
어떤 감각이든지 자주 사용해야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영적 미각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본질과 풍성함이 무엇인지, 이것이 나의 전인격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하나씩 살피고, 또 확인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함을 깊이 경험할 수 있다.
가만두면 악을 행하고 죄질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사람이 어떻게 거룩한 것을 사모하고, 의롭게 깨끗한 삶을 사모하게 되었는가? 우리 안에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한계를 통해 우리의 본래 모습을 보게 된다. 한계를 뛰어넘어 근본적인 것까지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의 개혁, 십자가의 구속을 바라본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나아가 부르짖는 자에게 베푸실 은혜를 기다린다.
오늘 하루가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항상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며 감사만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힘든 시련과 어려움을 묵묵히 이겨낼 힘을 공급하시고, 사탄의 강력한 유혹을 넉넉히 이길 힘을 베푸시는 예수님만 붙들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