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인간은 보는 것에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겉으로 보이는 것에 의해 판단을 한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사귀면서 겉으로 느껴진 것과 다른 점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어떤 것들은 오래 두고 보아야 아름답고, 오래 두고 보아야 그것의 참된 값어치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학교 출신인가, 어느 집안 사람인가, 그 사람이 어떤 실력을 갖추고 있는가, 외모는 출중한가, 모두가 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사람을 이해하려는 질문이다. 유대인들은 공의가 아닌 외모를 따라 예수님을 이해하려 한다. 예수님의 참된 모습은 놓치고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누구에게 배웠느냐, 배움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가르침을 할 수 있는가, 놀라는 수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 겉으로 드러나는 사역의 결과물조차 평가절하하고 예수님을 배척한다. 외형에 집중하는 ‘외관 지상주의’로는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성도의 바른 삶을 살기 어렵다.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의 변화를 위한 것이다. 단순히 지식을 쌓고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말씀의 진가는 그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때 드러난다. 말씀은 생명이다.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자유함이 있고, 생명의 풍성함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자 할 때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말씀이 품고 있는 정신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말씀의 문자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말씀이 가진 의미를 품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말하면서도 안식일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없으면 안식일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 사람이 있기에 안식일이 필요하고, 안식일의 의미가 살아난다. 그래서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식일의 정신을 따라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도 중요하다.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면서 전신을 온전케 하는 치유는 반대하는 어리석은 유대인들을 책망하신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다.
성경 말씀은 인간적인 지식과 세상의 방법으로만 풀리지 않는다.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에 성령의 조명과 깨우치심이 필요하다. 묵상할 때마다 먼저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서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의 조명없이 묵상하면 알맹이가 빠진 묵상이 될 수 있다.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그 속은 텅 빈것과 같다.
오늘도 성령의 조명으로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기를 소망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그리고 주의 은혜를 힘입어 사랑으로 섬기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