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9:13)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레위인이 첩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간다. 출발이 늦어서 도중에 해가 저물어 유숙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함께 하는 종이 제안을 한다. 가까이에 여부스(예루살렘)가 있으니 그곳에 유숙하자는 것이다. 당시에는 여부스에는 베냐민 지파와 가나안 원주민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삿1:21)
레위인은 여부스에서 유숙하기를 거절한다. 대신 조금 더 가서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서 유숙하자는 것이다. 그는 동족만 사는 곳이 더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전’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잘못하고,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레위인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앞장서서 섬기는 사람이다. 그는 한 노인을 만났을 때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 자신을 소개한다.(18절) 그는 말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그의 행동은 이율배반적이다. 율법이 금한 첩을 두었다. 첩이 행음했는데 좋은 말만 하여 데리고 집으로 가는 중이다. 하나님 말씀을 자신에게는 관대히 적용하고 이웃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레위인은 왜 불안해하는가? 누구보다 하나님의 든든한 후원을 받는 사람이 아닌가. 유숙할 곳을 찾을 때 동족만 사는 곳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이 죄를 행하며 사니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죄인들이 가득한 곳은 불안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은 모든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이다. 그러니 급박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하나님은 온전히 신뢰하지 못함이다. 입술에는 하나님이 항상 등장하지만, 마음으로는 섬기지 않는 것이다. 신앙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믿는 사람인가?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 않는가?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거리낌이 있거나 죄를 깨달았을 때 주저하지 않고 회개하고 단호하게 끊어내기를 소망한다. 입술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내 삶 전부를 맡기는 신앙인이 되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