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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 그냥 조용한 울음이 아니다. 큰 소리를 내어 통곡하신 것이다. 왜 성을 보시고 우셨을까? 예루살렘을 성을 보셨다는 것은 단순히 외형적인 건물만 보신 것이 아니다.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셨다. 그들의 삶을 보셨다. 마음 중심까지 살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이유가 무엇일까?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으면’ 좋았겠다고 말씀하신다(42절). 평화에 관한 일을 놓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왕위에 등극할 것으로 생각했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다. 정치적인 것이다. ‘호산나’ 외치며 환영하며 주를 따른 이유이다.

그들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가지고 오는 하나님 나라를 오해했다. 오해를 넘어 알지 못함, 무지했다.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지 몰랐다. 자신들의 생각대로 이해했다.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른다. ‘평화를 알지 못함’은 복음을 알지 못함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함이다.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따르니 주님이 펼쳐주시는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숨겨져 있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수고로움이 따른다. 찾고 또 찾아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간을 드려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땀을 흘려야 한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귀 있는 자들은 주님이 하신 말씀의 참뜻을 알아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영적인 귀가 열려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이 이해되고, 그 말씀의 참뜻을 알고 따르라는 요청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의 가정을 보신다. 교회를 보신다. 예배당을 보신다. 일터를 보신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눈여겨보신다. 주님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실까? ‘통곡하지 않으실까?’ 점검해 보자. 나와 가족들, 그리고 일터의 동료들을 위해 나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들을 위해 시간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평화의 복음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한다. 주님을 닮은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냄새가 생명을 살리는 냄새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