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제자들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주님을 가까이에서 따르던 야고보와 요한이 구한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정권을 잡으실 때 자신들에게 그 보좌의 좌우편 자리를 요청한다. 자리 욕심이 생긴 것이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 앞장서서 경쟁적으로 자리 청탁을 하고 있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교만한 생각이다. 다른 제자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들이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 자리 청탁을 하는 것이다.
분명히 두 제자는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어부였지만 배를 움직일 수 있는 나름 돈이 있는 집안의 자제였다. 이들의 어머니는 살로메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는 자매 관계였다. 예수님의 이모였다. 예수님과 혈연관계가 형성된다. 사회적 우월성과 혈연관계,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근거로 청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좀더 나은 조건을 가지고 있고, 더 나은 환경에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
‘기득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무언가 더 가진 경우이다. 다양한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기득권을 누군가는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무한 경쟁 사회에서 공평한 경쟁을 통해 정의를 세워가야 할 세상에서 기득권은 사회악이다. 출발부터 공평한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지지 못한 사람보다 한 발, 혹은 몇 발 앞서 나가서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 앞에서 과시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자신이 그들과 다름을…
문제는 그 ‘다름’과 더 가진 ‘기득권’을 섬김의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과시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주님이 걸으시며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십자가의 길은 ‘기득권의 길’이 아니다. 자기과시의 길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길이 아니다.
주님은 수난예고를 통해 자신이 걷는 십자가의 길이 어떤 길인지 보여주셨다. 결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려한 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그런 길이 아니다. 누구나 걷고 싶지 않은 길이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길이 아니다. 주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다. 섬김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길 원하셨다. 낮아지고, 종으로 섬김으로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영광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과 다른 길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영광은 이 땅의 영광이 아니다.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 무언가를 얻어서 드러나는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지시는 것이다. 구원을 길을 여시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길이다. 하나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믿고 따르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도 주님이 걸으신 그 길 위에 서 있기를 원하는가? 주님 걸으신 그 길을 걸으며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는가? 주님이 보여주신 아낌없는 사랑,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섬김, 아까워하지 않으신 십자가 헌신,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희생, 나는 죽고 이웃을 살리는 길, 바로 그 길을 묵상한다. 주님 걸으신 그 길 위에 서 있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