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4: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창 34: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야곱은 세겜에 장막을 치고 땅을 산다. 세겜에 터를 잡고 제단을 쌓는다.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머무는 곳은 중요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 분명히 있다. 특히 정착하여 제단을 쌓고 예배하는 일을 더욱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배하기 원하시는 곳이 세겜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서나 전심으로 예배하길 원하신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는 그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할 때 벧엘에서 한 약속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 그런데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터를 잡는다.
디나가 세겜 딸들을 보러 나갔다 성폭행을 당한다. 야곱 가정에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이다. ‘보러 나갔다’는 표현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호기심에 그 땅의 딸들을 만나 교제도 하고 나누기 위해 나아갔을 것이다. 다른 나쁜 마음이 있었던 같지 않다. 순수한 마음이다. 문제는 그녀를 지켜 보고 있던 그 땅의 추장 세겜이 첫 눈에 반했다. 강제로 성폭행을 하고 디나를 욕되게 하였다. 원인이 무엇일까? 본문을 통해 정확하게 파악하기 쉽지 않다.
‘보러 나갔다’는 표현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보다 더 문제는 벧엘이 아니라 세겜에 머문 야곱에게 있다. 신앙의 타협, 비슷하게 순종함이 문제다. 야곱은 세겜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만족한 것 같다. 그보다 먼저 기억하고 제단을 쌓고 예배할 곳은 세겜이 아니라 벧엘이다. 신앙의 적당한 타협, 비슷한 순종이 낳은 결과이다.
우리는 신앙을 이용하여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 한다. 평안하고,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꿈꾼다. 실제로 신앙생활에 그러한 유익이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부수적 유익만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면 곁길로 가게 되어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제자의 삶’은 우선순위에서 뒤쳐진다. ‘헌신’ 보다는 ‘누림’을 더 우선시 한다. 십자가와 그리스도로 내 삶을 채움보다는 세상 물질로 채우길 원한다. ‘세상의 논리와 가치’가 우리 신앙을 잠식시키는 것이다.
보러 나가는 ‘단순한 삶’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를 넘어뜨리는 유혹들이 있기에 더욱 주의해야 한다. 세상의 힘의 논리는 결코 우리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세겜이 디나를 끌어들여 성폭행한 것처럼… 그렇다면 강력하게 우리를 끌고 가는 힘이 무엇인가. 세속화의 유혹, 이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 깨어 있지 않으면 휩쓸리게 되어 있다. 내 생각과 철학, 논리가 아니다. 말씀에 근거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확고함’이 우리를 유혹에 대항하여 버티게 해 준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세파를 따라 유영하며 즐기는 물고기가 아니다. 흐르는 물살을 가르고 자신이 가야 할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물고기다. 세파에 따라 떠내려가는 물고기는 죽은 물고기다. 오늘 우리들을 유혹하는 ‘번영신학’과 ‘복음’을 구별해야 한다. 내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불편할지라도 복음을 갈망해야 한다. 복음만이 소망이고 우리의 행복이다. 채색되거나 양념된 복음이 아니라 거칠어도 맛이 덜해도 세상의 것과 섞이지 않은 ‘순전한 복음’을 갈망한다. 내 입맛에 길들여진 복음이 아니라 ‘아버지 마음’을 담아내는 복음을 갈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