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0: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사람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한다. 실제 이복 누이인 것이 맞다. 그런데 그가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말함으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거짓말한 것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증거 해야 옳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끝까지 자기변명으로 일관한다.
거짓말은 자기변명을 낳는다. 자신이 왜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면 자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마음이 있다. 누구나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자신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내 안의 연약함과 잘못을 덮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무리 숨기고 똑 꼭꼭 숨겨도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그렇다면 자기변명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잘못을 덮고 변명하고, 정당화 작업을 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거짓말은 계속하여 악을 낳기 때문이다. 한 번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굳이 변명하려고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된다.
나를 연약함과 죄를 인정하고 나면 하나님을 의지하기 쉬워진다. 하나님을 드러내기도 쉬워진다. 나의 열심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오늘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 모습 뒤에 가려져 있던 하나님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삶,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지혜이다. ‘성도다움’을 다른 곳에 찾기보다 하나님을 인정하며 정직하게 사는 삶에서 회복하길 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