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2: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은 도망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찍이 따른다. 거리감을 두고 따른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자기 모습을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위로를 하고 그래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호언장담하고 당당했던 모습들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는 스승, 주님은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웠을까.
스승은 제자들을 통해 빛나게 되어 있다. 주님은 마음은 제자들에게 집중되었을 것이다. 비겁하게 행동하는 그들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로 향하는 길에서 당당하다. 너희들도 이렇게 나를 따라오라고 제자들을 위해 본을 보이시는 것이다. 육신의 몸을 입으신 주님인들 왜 두렵지 않고, 고통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겠는가. 그래도 주님은 그 길을 주저하지 않고 걸어간다.
시험의 때를 위해 겟세마네에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다. 매일 하루를 시작하실 때 해뜨기 전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다. 매일 반복되는 삶인듯하지만 그래도 주님은 기도로 시작하신다. 매일 우리의 삶이 똑같이 느껴져도 똑같지 않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우리의 삶도 한 번 지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며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계셨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나를 핍박하고 십자가로 끌고 가리라 말씀하신다. 앞에 다가오는 고난의 무게가 느껴지셨을 것이다. 겟세마네의 고뇌가 이곳에서도 반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 때문에 주춤거리지 않으신다. ‘인자가 하나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말씀하신다.
주님이 당당하게 대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또 제자들을 위해서이다. 주님을 따르는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서이다.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힘을 얻고 주님처럼 당당하게 따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무리 크고 어려운 일을 만난다고 해도 주님과 같은 고통을 아닐 것이다. 주님을 보고 위로받고 따라오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를 지나서 하나님 권능의 보좌에 앉으신다. 하나님이 아들을 사망의 권세 아래 버려두지 않으시고, 약속을 따라 사흘 만에 부활의 은혜를 베푸신다. 부활의 첫 열매로 주님을 믿고 믿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이 주님처럼 영생의 삶으로 부활할 것을 약속하셨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도 없다. 고난을 지나 영광의 내일이 있다.
예수님이 권능의 보좌에 앉으신 것은 우리를 위로하고 도우려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와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는 비결은 주님께 달려있다.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은 욕심이다. 교만한 생각이다. 유혹과 고난이 다가올 때 주님이 공급하시는 하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겸손히 주님께 무릎을 꿇고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오늘 앞에 펼쳐질 일들이 무엇이든 주저하거나 도망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앞에 있는 즐거움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을 묵상한다. 어떤 일을 만나도 부르신 소명을 잊지 않기를 기도한다. 내게 주신 사명의 길을 걸어갈 때 비록 힘들고 어려운 가시밭길이 나타나도 내일의 소망으로 이겨내길 기도한다. 앞에서 이끄시고 뒤에서 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그 사랑 때문에 넉넉하게 이기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