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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4:5)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조상들 곧 선왕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무리가 더 중요하다.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것은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이다.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것이지만 마지막 죽음은 평안한 죽음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평안한 죽음일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부러워할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선호할까? 나이 드신 어르신들 사이에서 ‘구구 팔팔 이삼사’(99 88 234)라는 말이 유행되었던 말이다. 구십 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좋은 죽음을 ‘익숙한 환경에서’, ’가족 친구와 함께‘,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고통 없이 죽는 것‘을 좋은 죽음이라고 말한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나라에 의해 멸망 당하는 나라를 지켜봐야 했고, 자신도 포로로 잡혀간 왕이다. 포로로 잡혀가기 전 도망하려다 체포된다. 야반도주가 실패로 마무리 되었다. 아들들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처형을 당했고, 자신도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의 죽음이 평안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의해 세워진 왕이다. 바벨론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기회를 엿보았다.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이 시드기야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 싶었다. 애굽의 도움을 기대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바벨론에 의해 망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도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벨론에 순순히 항복했다면 그의 삶은 하나님 말씀대로 평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생각을 따라 행동했다. 어리석었다. 인간의 생각이 아무리 지혜롭고 잘 준비된 계획일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인간의 생각을 비교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따라 평안한 삶을 살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길 원하신다. 시드기야가 백성의 외면을 받은 여호야김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시드기야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며 안타까워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그를 생각하며 애도하게 하셨다. 마지막 떠나는 그를 안타까워하는 조문객을 주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어떤 삶을 평안한 삶으로 묘사할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의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고, 평안에 들어가는 죽음이다. 자기 침상에서 편히 쉬는 죽음이다(사57:1-2). 의인의 길, 옳은 것을 분별하며 바른길을 걷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가족과 지인의 배웅을 받는 죽음이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거부하다 멸망을 맛보았다. 교만함과 자기 고집 때문에 회개의 기회도 놓쳤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웰다잉이 중요한 시대이다.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나님 품에 안기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부르실 때 큰 고통 없이 평안히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