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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3:15)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맹세한 사람들이 40명이나 있었다. 자기 생각과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다르다고 한 사람의 생명을 자신들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다. 생명의 주관자를 무시하고 사람의 생명을 취하려는 교만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을 심판하시고, 그 계획을 꺾으신다.

그들은 척하는 사람이었다.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먹고 말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바울에 관해 더 묻고 확인할 것이 있다는 이유로 공회에 청한다. 천부장이 그를 공회로 데려오길 원한다. 그런데 그들의 진짜 속마음은 그렇게 바울이 이동할 때 급습하여 죽이는 것이다. 죄수를 압송하는 과정에서 죽인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이중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속이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다.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겠다고 말하면서 사탄의 방법을 사용한다. 어리석은 행동이다. 오로지 자기 목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이용하고, 종교를 이용하는 악한 행동이다.

그들의 결연한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그들은 금식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고 맹세했다. 금식은 자신의 힘을 빼고 하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오히려 더욱

자신들의 힘을 불어넣기 위해 금식을 사용한다. 가장 순수해야 할 종교적 헌신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성취할 도구로 사용한다.

때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소원이 있을 때 금식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기 소원을 꼭 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을 설득하여 자기 뜻을 성취하는 데 사용하곤 한다. 이것도 잘못이다. 금식은 내게 어떤 필요가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하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매달리기보다 이웃을 돌아보는 금식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라고 우리에게 교훈한다. 금식은 결코 우리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종교적 수단이 아니다.

선한 일에 대한 마음을 다짐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드리며 헌신할 때 사용할 맹세를, 이웃을 괴롭히고 죽이는데 악한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한다. 맹세를 통해 자기 뜻을 강조하고 사람을 위협하고 공격한다. 모든 것이 의롭고 선한 일로 포장된다. 척하는 것이다. 위선이다. 가식이다. 모양내기이다. 악한 본성의 표현이다. 부패하고 오염된 인간의 현주소이다.

사람의 열정이 방향을 잃으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삶의 속도, 열정보다 방향, 성실함이 더 중요하다. 내가 바라보는 방향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내 뜻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본다. 내가 매일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기억하고 부르심의 소명을 향하여 하늘의 은혜를 구하며 살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