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5:63)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을 시작으로 가나안 땅의 중부 지역을 정복하고, 남부와 북부 지역으로 정복의 범위를 확장하며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다. 이 정복 전쟁에서 유다 지파는 선봉에 서서 싸운 용맹한 지파이다. 기업을 분배받을 때도 제일 먼저 제비를 뽑고 기업을 분배받았다. 장자가 아니지만 앞장서서 충성하는 유다 지파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은 각 지역을 기업으로 주시면서 자기 기업 가운데 남은 적들은 스스로 멸하라고 하셨다.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은 적의 심장을 치고 대세적인 승리를 요구하는 전쟁이 아니다. 진멸 전쟁이다. 신명기 20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족속들 가운데 호흡이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하셨다. 진멸하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유다 지파는 진멸에 실패한다. 예루살렘 주민이었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잠시가 아니다.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다. 하나님이 진멸하고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불순종은 우리 삶에 큰 아픔을 가져온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는 그들이 ‘너희의 올무가 되고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리라’(삿 2:3)라고 하셨다. 가시와 올무는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해 작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처음에는 조금 불편할 수 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매우 불편하게 하고 결국은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분명하다. 죄없는 사람들을 그냥 죽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행한 악행들에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그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위한 배려도 그 안에 담겨 있다. 가나안 사람들의 악행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작은 불씨라도 완벽하게 제거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그들도 심판받지 않도록 예방적 차원에서 하나도 남기지 말고 멸하라고 하신 것이다. 항상 모양은 그럴듯한데 그 중심이 변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분명히 자기에게 주신 기업을 정복했다고 하는데 남겨 두는 것이 문제이다. 120개 성읍 가운데 하나이니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정도는 하나님도 간과해 주시리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할 때 온전히 순종하길 원하신다. 우리를 위한 배려이다. 우리가 걷는 믿음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양보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들이 은근히 우리를 넘어지게 만든다. 죄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타협하면 안 된다. 하나라도 찾아서 남김없이 제거해야 한다. 악한 습관은 반드시 악행으로 나아간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 대적 마귀는 며칠을 굶주린 사자처럼 먹잇감을 찾아 으르렁거리고 있다. 조그마한 틈새만 보여도 공격하려고 엿보고 있다.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며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요구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참 지혜를 소망한다. 말씀 앞에 서서 나를 살피고 말씀의 교훈을 따라 순종하며 살기를 기도한다. 악한 세상 속에서 순결한 신앙 생활, 오직 믿음으로 하늘의 은혜만 구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