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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6: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욥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말을 하는 친구들을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로 평가한다. 위로자는 문제들을 해결할 힘을 갖도록 돕는 자이다. 견고한 마음을 가지고 고난 중에 일어서도록 돕는 자이다. 그런데 위로자가 재난을 준다. 재난을 준다는 것은 오히려 마음에 고민하게 하고, 불행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까지 생각하여 오히려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역설적이다. 위로자는 곁에서 붙잡아 주고 힘을 실어주는 사람인데 힘을 빼고, 흔들어 놓는 자이다.

이런 말은 헛된 말이다.(3절) ‘헛되다’는 단어는 ‘루아흐’라는 단어가 쓰였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숨결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바람’으로 읽을 수 있다. 바람과 같이 한번 불어왔다가 사라지는 말이다. 좋은 말은 마음에 오래 남도록 힘이 되는 말이다. 힘을 빼고, 상처가 되는 말이 아니라 힘을 주는 격려가 되는 말이다. 욥의 친구들은 좋은 말,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하기 위해 와서 정반대의 말을 쏟아 내고 있다.

그럴듯한 말이다.(4절) 정확하고 진리의 말이 아니라 그럴듯한 말이다. 진리가 아니라 진리 같아 보이는 것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그럴듯한 말이 우리를 속이고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도 그럴듯한 논리로 욥을 유혹하고, 넘어지게 공격한다. 그러나 그럴 듯한 말은 진리가 아니다. 위로자는 그럴듯해서는 안 된다.

입술의 위로이다.(5절) 마음을 담은 말이 진정한 위로이다. 그런데 위로한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이 실리지 않아 입술에 머무는 말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담아야 한다. 우리들의 위로자 되시며 진정한 소망이신 예수님은 어떠신가? 히브리서 4장 15절을 우리에게 증거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동정한다는 것은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만져주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고통당하는 자를 주님은 긍휼히 여기신다. 자신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신다. 진정 우리의 일은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같이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우리가 힘을 얻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시다. 히브리서 4장 16절을 우리를 초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늘 우리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 담대히, 당당히 나아가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우리는 재난을 주는 위로자가 아니라 주님을 닮아 마음을 함께하는 위로자가 되자.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마음을 담은 위로의 말로 대화하자. 고통 가운데 힘들어하는 우리의 형제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누구를 만나라고 하시는지, 그와 어떻게 마음을 나누기 원하시는지 조용히 기도하자. 작은 것 하나라도 삶으로, 행동으로 묻어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