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9:1-2)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은 빌닷의 주장이 옳다고 먼저 인정한다. 빌닷의 말처럼 하나님은 참으로 의인을 지키시고 악인은 벌하신다는 것을 잘 안다는 것이다. 고난의 죄의 결과라는 말을 인정한다. 이 땅에 고난이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가? 아담의 범죄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고, 그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다양한 고난들이 죄의 결과물들이다. 그러니 고난의 뿌리를 찾아가면 죄이다. 죄가 있기에 고난이 있다.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욥은 먼저 인정한다. 그리고 난 후 빌닷의 주장이 문제가 있음을 제시한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이 땅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빌닷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을 받을 인생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런 하나님의 고난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다. 아무리 우리들이 노력하고 애써도 의로울 수 없다. 때때로 선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 아니 애써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들의 선함에는 한계가 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고, 언제 선을 행했느냐는 듯 악을 행하는 이유이다. 손을 뒤집는 것은 한순간이듯 인간의 선과 악은 한순간에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만들어낸 이 땅의 의로움은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더러운 옷과 같다. 선을 행하는 우리가 부정한 자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사람에게서 나온 행동이 깨끗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은 의로울 수 없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전의 사람들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삶에는 죄악이 가득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다. 노아와 그의 가족, 롯과 그의 가족의 구원이 그들의 의로움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조건없는 은혜이다. 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알지 못하는 까닭없는 은혜이다. 노아가 의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의롭게 살게 된 것이다. 롯도 삼촌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하나님이 구원하셨다.
오늘 우리가 사람답게 살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살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내고, 내 안에서 나오는 의가 아니다. 내가 옳게 행동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옳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거룩한 삶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조금 다른 점이다. 하나님을 생각하니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 마음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찾아오셨기에, 값없이 구원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은혜로 사는 인생이다. 하루를 보람되고 가치 있게 사는 길은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한다. 그 은혜가 삶에 흘러 넘치고, 은혜가 이웃으로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