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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과 함께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식탁에 함께 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불만을 표한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죄인들과 교제하느냐는 것이다. 의인이면 의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제하는 사람들도 의로운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죄인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은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생각했다.

세상의 가치는 누군가를 가까이 하면 그 사람도 가까이 하는 사람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한다. 옛 말에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 자적(近朱者赤)”이라 하였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게 되고, 붉은 주사를 가까이 하면 붉어진다는 말이다. 사람은 가까이 하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당시 바리새인들은 정결법에 따라 부정한 사람들, 죄인들을 멀리했다. 자신들도 더러워진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가까이 함으로 자신도 오염되고 더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을 의롭게 만들고 변화된 삶을 살게 하셨다. 세리 레위를 불러서 사람들의 원망을 받는 삶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는 제자의 길을 걷게 하셨다. 삭개오를 만나셔서 함께 교제하며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구원받은 백성의 삶을 살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오염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의로움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병을 가진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는 필요하지 않다. 그처럼 주님이 필요한 사람은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고 의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자신의 힘으로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믿는 사람들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자신의 현재 형편을 바르게 이해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위해 오셨다.

코로나 19로 인해 대구와 경북이 큰 어려움 가운데 있다. 정말 그들에게 의사가 필요하고, 치료를 받을 병실이 필요하다. 확진 환자들은 속히 질병이 치유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전하기 원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증상 감염이 그 좋은 예이다. 증상이 없기에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는 것이다. 사람의 부패한 본성은 자신이 쓸모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름 선하고, 쓸모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 움직이고 행동할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웃들을 오염시키고, 부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의사가 필요하다. 격려된 청정공간에서 확실하게 치료받아야 한다. 적어도 열병처럼 문제없이 앓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감염되지 않고 격리된 공간에 머물며 자연치유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오늘 우리의 아픔이 지나갈 것이다. 문제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자신이 고장 났다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무증상 감염자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직관하고 “자가격리” 혹은 입원 치유를 받아야 한다. 부패한 인간에게 필요한 분은 만병의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도 그 주님이 나를 만지시고 치유하심으로 더 큰 병이 발병하여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예방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