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5: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 처형하는 이유를 기록한 패를 십자가 위에 붙였는데 그것이 죄패다. 죄패는 죄명, 죄목을 알려주는 판이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정죄를 당하셨다.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표시된 죄패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의 죄를 기록한 죄패이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단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인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썼다. 나사렛 예수로서 유대인의 왕이라 주장하여 처형되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죄목이라 불렀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의 행동을 통해 진리를 선포하신다. 예수님은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시다.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려고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특별한 사람을 위한 왕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왕이다.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 모두의 왕이시다. 우리 삶을 주관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죄패를 통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신다. 왕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조롱으로 생각하는 문구를 보면서 나의 왕은 누구인가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신다.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도 죄패를 보면서 ‘자기 삶의 주인이 누군지’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도 떠난 후에 떠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할 텐데 어떻게 기억할까? 내 삶을 간략하게 요약한 요약문을 붙인다면 어떻게 붙여볼 수 있을까? 내가 누운 자리에 어떤 글이 새겨질까? 떠남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선포하는 삶을 생각해 본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미리 생을 정리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실 때 무엇을 위해 그 길을 가고 있는지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인류 구속의 구원역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걸어가셨다. 힘들고 수치스러운 길이지만 그 길의 끝자락에서 이루어질 결과를 내다보면서 당당하게 걸어가셨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질문해 본다.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을 따라 믿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지 돌아본다. 항상 인정받고 높임을 받는 자리에 서기를 좋아하고 손해 보기를 싫어하는 성향이 누구에게나 있다. 대접받기를 원하고 대접하기를 주저한다. 섬기기보다는 섬김받기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기 어렵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주님은 상처를 입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온갖 조롱과 수치를 당하고 상처 입은 채 달리셨다. 그런데 그 상처가, 그 십자가가 나를 치유하고 살려내었다. 오늘을 살게 한다. 그래서 나도 주님처럼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한다.
상처 난 자리가 아물면서 향기가 묻어나고, 아름다움이 형성된다. 상처 난 자리로부터 예수님을 닮은 향기가 조금씩 퍼져간다. 그 향기가 예수님을 소개하는 향기이며, 예수님을 증언하는 냄새이다. 우리의 언행과 마음에 품은 생각이 예수님으로 채워지길 꿈꾼다. 꿈꾼다고 하여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꿈을 꾼다.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인간의 탐욕과 욕심의 결정체가 아니라 섬김과 나눔의 향기가 가득한 열매이길 기도한다. 한 걸음씩 내딛는 길이 힘들어서 넘어지기도 하고 머뭇거릴지라도 다시 일어서 걸어갈 힘을 주시길 기도한다. 좋으신 아빠 하나님이 함께 걸어가며 손잡아 일으켜주심을 경험하길 기도한다. 조용히 골고다 언덕에 우뚝 선 십자가, 모든 것을 내어주신 상처 입은 예수님을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