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사도요한은 요한일서를 쓰는 이유를 먼저 밝힌다. 편지의 수신자들, 오늘 우리 시대의 독자들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활 속에서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거듭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건강하고 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 믿었다. 영육 이원론에 사로잡혀 영이 구원받으면 육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약하고 악한 육신이 죄를 짓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죄짓는 삶을 경계하지 않고 나름대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단호하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요한일서를 쓴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진다. 이 땅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여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도록 부어진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반드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사랑이 나타나야 한다. 반대로 미워하면 사랑이 없는 것이다. 미워하면 생명이 없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어둠 가운데 있다.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것이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빛의 자녀이다. 여전히 죄를 짓고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다. 어둠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갈 곳을 알지 못하게 한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게 만든다. 아직 주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도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다. 삶과 신앙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영과 육이 합하여 전인을 이룰 때 건강한 사람으로 살아가듯 신앙은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바른 신앙은 죄짓지 않는 삶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가끔, 자주 죄를 짓는다. 요한은 1절 후반부에서 증거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만일’이다. 죄짓지 않는 삶을 살도록 애쓰라는 것이다. 죄짓지 않기 위해 살다가 혹 죄를 지어도 걱정하거나 낙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죄짓지 않는 삶을 살다가 육체의 약함과 사탄의 유혹으로 가끔 넘어져도 너무 낙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유는 우리를 위한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대언자는 우리를 대신하여 변호해 주는 변호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평가하지 않도록 우리 대신 변호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니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 깨끗함을 얻고 죄짓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죄에 넘어지고, 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삶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 위에 견고히 서기를 원하신다. 말씀이 삶에서 꽃피우며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묻어나길 원하신다. 오늘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죄짓지 않고 살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