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이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유대교를 훼파한다는 죄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성난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한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임을 확인한 천부장이 그를 정중히 대하고, 무슨 이유로 유대인들을 그를 죽이고자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유대 지도자들을 소집했다. 산헤드린 공회와 종교 지도자들을 부른 것이다. 그들 앞에서 바울이 자기 변론을 하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결코 비굴하거나 위축된 모습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공회를 주목하여 바라보았다. 당당하게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한 사람의 행동, 그의 시선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살필 수 있고, 또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떳떳하게 전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바울의 당당함은 그의 고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라고 고백한다. ‘섬긴다’라는 표현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라는 표현과 같은 단어이다. 자신의 섬김이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길이었고, 내 양심에도 거리낌이 없는 길이었다고 고백한다. 한두 가지 일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눈 찔끔 감고 “한번 해보자”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질문해 본다. 누군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 앞에서 서서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매 순간 우리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까지, 우리의 앉고 일어섬,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울은 자기도취에 빠져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죄를 심문하는 산헤드린 공회원 앞에서 자신에 대해 변호하고 있다. 중요한 자리이다. 범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자리이다. 만약 거짓말로 드러나면 더 큰 중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위축됨이 없이 바울은 당당하게 자기변호를 한다. 적어도 그는 이제껏 자기 생활에 대해 책임질 자세로 걸어온 것이다.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했다. 그리고 복음 전도자로서 자기 생각이나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복음만 선포하기를 힘썼다. 그도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있었기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고백했다. 자기를 살피고 하나님 뜻에 복종하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살피고 행동한 것이다.
바울은 하루를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며, 돌아보았을 때 양심에 거리낌이 없게 하려고 힘쓴 것이다. 매일 하나님 앞에서 주신 말씀을 따라 자신을 점검하는 일을 필수이다. 말씀 앞에서 나를 살피지 않고 거룩하고 구별되게 살 수는 없다. 악한 본성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내면의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부단히 확인해야 한다.
건강하고 바른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자기 정체성이 흔들리면 삶도 흔들린다. 성령에 사로잡혀 자신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시키며, 사명의 길을 걸었던 바울을 묵상한다. 주의 일을 한다는 이름 아래 허투루 살지 않기를 기도한다. 바울을 다듬으셨던 하나님께서 나도 다듬어주셔서 매일 양심에 거리낌없이 살도록 은혜 베푸시고 인도해 주시길 기도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