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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5:3)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 르호보암에 행한 모든 죄를 행한다. 아버지가 지은 죄를 보고 아들도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만이 아니다. 어머니 마아가도 우상숭배자였다(대하 15:16). 부모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방법을 찾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살고 있다.

이런 이중적인 삶이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아비얌의 본성이 악해서인가? 맞다. 부패한 본성이 우리을 악행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곳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이 세상의 방식으로 자기 필요를 채우라고 은근히 유혹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채우신다는 믿음이 흔들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우선순위에 놓이지 않고 하나님이 우선순위에 놓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 나면 생각나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가 하는 것을 본받고 따르게 되어 있다. 아이들은 가르침을 받는 대로 행동하기 보다는 본 대로 배우고 행동한다, 부모의 삶이 가장 좋은 교육자료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는 각별하게 주의하고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내 소유물이거나 나를 빛내기 위해 주신 장식품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본을 보이고, 믿음의 다음 세대로 이어달리기 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라고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지고 산다. 부모는 자녀를 보면서 배우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얻는다. 자녀는 헌신적인 부모의 양육을 힘입어 세상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간다. 이런 과정에서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만이 아니라 상처도 남는다. 기대하는 것들을 다 채워주지 못하고, 아쉬움이 남는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면서 더 못함에 대한 부채 의식, 즉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산다. 부모도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좋은 관계는 좋은 본을 보이고, 그 본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다. 무엇이 좋은 본일까? 믿음의 삶이다. 사랑의 삶이다. 섬기는 삶이다. 자기를 내어주는 삶이다. 이런 삶의 좋은 본보기는 디모데이다. 디모데는 어린 시절부터 청결한 양심을 갖고 회개 기도를 하며 거짓 없는 믿음 생활을 했다. 디모데의 성품이 천성적으로 깨끗하고, 넉넉하고 좋아서 이런 삶을 산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가르침을 받고,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성경은 디모데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외할머니와 어머니 속에 있었던 거짓 없는 믿음이 디모데에게도 있었다면 우리도 꿈을 꿀 수 있다. 내가 하늘의 은혜를 힘입어 좋은 믿음의 본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녀와 손주에게 가장 좋은 신앙교육을 하는 것이다.

어릴수록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양육의 과정에서 모든 것을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좌우로 흔들며 찬양하면 그 아들도 동일한 모습으로 찬양한다.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신기할 정도로 똑같이 행동한다. 여기에 답이 있다. 우리의 삶은 자녀에게 복사되게 되어 있다. 유전인자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고 있다.

선한 영향력만 전달하고 내가 좋은 본보기가 되길 원한다. 그리고 여러 많은 본보기 중에 선한 본보기만 보며 따라가길 소망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의 사람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가길 기도한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거짓 없는 믿음과 청결한 양심으로 살아가도록 다듬어 주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