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37:14) 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 가매
예레미야 선지자는 베냐민 지파 아나돗의 제사장이었던 힐기야의 아들이었다. 그가 베냐민 지파를 방문하는 것은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소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진심을 믿지 못한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파에게로 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땅을 사려고 한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갔다가 어려움을 만났다.
바벨론 군대가 유다를 침공해 왔다가 애굽의 군대가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퇴각한 상황이다. 유다 사람들은 긴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 다시 바벨론 군대가 공격해 오지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거기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한 대로 바벨론이 공격해 왔는데 다시 공격해 와서 정말 우리가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을 것이다. 긴장하고 있는데 예레미야가 나타난 것이다.
베냐민 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우두머리인 이리야가 예레미야를 체포한다. 이유는 적 바벨론에게 항복하러 가려 한다는 것이다. 이리야는 수문장으로서 수상한 사람을 적시에 분별하여 체포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베냐민 고관들에게 데려간다. 그런데 그 고관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뚜껑이 있는 웅덩이 감옥에 가둔다.
예레미야가 정말 나라에 적대행위를 하여 체포된 것이 아니다. 감옥에 갇힐 이유가 없음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갈대아인, 바벨론 사람들에게 항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수문장 당신이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나는 항복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리야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냥 체포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한 것이며, 지금 베냐민 지파를 방문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이다. 망하는 나라의 땅, 그 순간도 기업 무를 자로 의무를 다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유다의 죄 때문에 심판하시지만 결국은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에 대한 상징적인 행동이다. 긍휼의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행동이다.
사람을 선입견으로 대하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자기가 경험한 과거의 경험만이 유일한 기준이 되고, 그 기준을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줄 것을 당부한다. 사람을 대할 때 우리의 판단과 생각은 내려 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지은 존재이다.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내 판단과 선입견으로 대하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리는 행위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용서하신 일을 기억해야 한다. 병든 사람,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도 세상으로 파송하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병든 사람을 치유하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다. 사람을 죽이지 말고 살리라고 하신다.
사람을 살리는 길은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것이다. 내 선입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나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인데, 나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것처럼 나도 이웃을 용납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야 한다.
선입견은 사람을 과거에 묶어 두는 행위이다. 편견은 사람을 내 마음대로 대하는 행동이다.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하기 위해 하나님의 시선이 필요하다.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선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사람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간다. 오늘도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살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