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이어서 가난한 과부가 드리는 헌금을 보셨다. 그들이 얼마를 헌금하는지 살피셨다. 부자들, 가난한 사람들, 과부, 다양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신 것이다. 예수님이 보신 것은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많은 헌금을 드렸느냐보다 자신이 가진 것에 관해 어떻게 이해하고 드렸느냐를 보셨다.
살피시고 주님은 한 과부의 적은 헌금, 두 렙돈을 가장 큰 헌금으로 말씀하신다. 겉보기에는 아주 보잘것없는 정도의 헌금이지만 예수님은 다른 관점으로 보셨다. 이 여인은 가난한 중에 자기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이다. 헌금의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즉 헌신이다. 이 여인은 이것을 드릴 때 “비록 적지만, 저의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드렸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색함으로, 아까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것을 드리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아 마지못해 공과금을 내듯 내는 헌금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헌금을 통해 내가 가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길 원하신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존재이다. 내 것은 없다. 우리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헌금을 기뻐하신다.
‘전부를 넣었다’는 말씀을 통해 주님은 우리도 우리의 삶 전부, 나를 드리는 삶을 요청하신다. 내 것을 챙기고, 나를 위한 계획은 원대하고 치밀하지만, 하나님을 높이고 증언하는 일에는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가? 코로나가 한창일 때 교회가 예배하는 이유를 헌금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말 그런가? 어리석은 표현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없는 가운데 온갖 것을 지으신 분이시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내 교회’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책임지시고 움직이신다. 우리가 드린 헌금에 좌우되지 않는다. 헌금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높이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으로 고백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며 찬양하는 시간이며 동시에 나를 드리는 헌신의 시간이다. 또한 성도들이 서로 만나 교제를 나누며 유혹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말씀에 순종하고, 어떻게 세상 유혹을 이기는지 서로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다. 살아온 한 주를 되돌아보고 살아갈 한 주를 꿈꾸는 시간이다.
헌금에 대한 말을 하면 교회가 어려워서 헌금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신앙생활과 헌금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 내면의 탐심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하게 방해한다. 헌금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내 마음에 있는 탐욕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내 생명을 주관하심을 믿자. 오늘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순종하며 살기를 기도한다. 내면에 숨겨진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나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