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6: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다윗이 전쟁에 승리하고 그 자리가 견고해 졌다. 정치적, 군사적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에 모셔 오기로 마음 먹는다. 이스라엘 중 삼만 명을 뽑았다. 군인들이 보호하고 많은 백성이 악기를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법궤를 운반한다. 법궤를 바알레유다, 기럇여아림에서 다윗성으로 운반하려는 것이다.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온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 다윗과 이스라엘 족속은 여러 악기를 가지고 찬양했다. 문제는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이다. 그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잡았다.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그 자리에서 죽는다. 이 일로 다윗이 분함을 드러낸다. 온 마음을 다해 법궤를 다윗성,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려 했는데 실패했다.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머무는데 오벧에돔과 그 온 집이 복을 받는다.
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은 법궤를 새 수레에 실었을까? 분명히 말씀에 의하면 레위지파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하는데 이런 방법을 선택했을까? 정말 말씀을 몰랐을까? 다윗의 이제까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생각할 때 이해되지 않는다. 삼만의 사람, 찬양하는 찬양대… 진심으로 환영하며 모셔오려 한다. 그럼에도 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불러 일으켰을까?
수레에 실었을 것에 대한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자.
❶블레셋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수레에 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대적이자 하나님의 대적임을 알았다. 블레셋 사람의 습관을 다윗이 법궤를 옮겨오는 방법으로 선택했을까? 확신이 서지 않는 해석이다.
❷말씀을 몰라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다윗의 법궤를 옮겨오는데 말씀을 분명히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최선의 준비를 했다. 당연히 말씀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행동했을 것이다. 말씀을 몰라서 수레에 법궤를 실었을 리 없다.
❸그렇다면 왜 수레에 법궤를 실었을까? 가능성 있는 해석은 효과적인 방법으로 법궤를 옮기려는 것이다. 좀 더 빠른 시간에 옮기고 싶었을 것이다. 백성의 지휘관과 의논하고 선택한 방법이다(대상13:1). 사람이 어깨에 메는 것보다 수레에 싣고 옮기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 생각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방법은 하나님이 이해해 주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웃사를 쳤을 때 다윗은 분하여 한다. 다윗이 분했다는 것은 열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방법이 실패하는 것을 생각하며 열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은 것이라면 다윗이 열받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이었다. 적어도 이 방법을 하나님이 허락하실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깨우치는 교훈이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지극히 효율을 따지는 사회이다. 경제적 가치를 논한다. 성도들도 어떤 것이 더 지혜로울까 생각할 때 말씀이 그 기준이 되지 않는다. 말씀보다 성도가 유익하고,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일까를 생각한다. 우리들의 유익과 효율이라는 우상을 내려놓아야 한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위한다 하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좀 시간이 걸려도, 비효율적으로 생각되어도 말씀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야 한다.
오늘 사는 지혜를 마음에 담는다. 좀 느긋이 말씀 앞에 앉아 말씀을 더욱 깊이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말씀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