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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8:2)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욥의 친구 빌닷은 욥이 ‘악한 자’라는 전제를 가지고 깨우치고자 한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볼 때, 인과응보의 원리를 생각할 때 욥은 죄인이라고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욥을 설득하고자 한다. 그래서 빌닷은 욥에게 ‘어느 때까지’ 자기주장만 할 것인가 책망한다.

환난을 만날 때 하나님의 훈련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인내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는 다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고난의 시간이 빨리 끝나길 기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정금 같이 단련되기를 기다리신다. 우리 시간표를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루실 시간을 충분히 생각하며 인내해야 한다.

빌닷은 인내하지 못한다. 언제까지 자기 말만 하겠느냐고 욥을 다그친다. 욥에게 그만 고집을 꺾고 회개하라는 것이다. 더 이상 회개할 내용을 명확하게 찾지 못한 사람에게 계속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고문이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 ‘죄 죄었다’는 자백을 강제로, 물리적 힘을 가하여 받아내는 것과 같다. 인간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범죄이다.

빌닷은 ‘깨달으라’고 말한다. 욥이 무디고 둔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빌닷의 이런 이해는 환경과 나타난 결과로부터 왔다. 사람을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는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나오지 않았다. 결과로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면 오해하기 쉽다. 겉으로 드러나 첫인상, 선입견으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빌닷은 나타난 결과로 욥의 삶을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환난을 만나고, 질병을 앓는 사람은 다 악한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가난하고, 질병을 앓고, 고난을 겪는 것인가? 반대로 부자로, 건강하며 하는 일마다 잘 되면 다 선하게, 의롭게 사는 사람인가? 결코 나타난 결과로 그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 판단할 수는 없다.

우리가 기준으로 삼는 현상은 때때로 정반대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히려 정직하지 않고, 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틀이 중요하다. 어떤 기준으로 사건과 사물을 이해하느냐는 세계관의 문제이다. 성도는 말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말씀이 기준이다. 말씀에 근거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욥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이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고, 물질도 은혜로 얻었다. 행위가 아니다. 그런데 행위로 나타난 결과를 다 해석하려 한다면 실수하는 것이다. 성도는 은혜로 우리에게 나타난 현상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경건하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하나님이 조건없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이 선한 삶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빌닷은 사랑 없는 말로, 논리로 욥을 설득하려 하는 것이다. 말보다 사랑이 먼저이다. 사랑의 관계가 사람을 설득할 우선순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사람을 설득하는 3요소를 ‘ethos, pathos, logos’라고 하였다. 에토스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한다. 그 사람의 됨됨이, 인격이 바르면 많은 사람이 설득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설득에 60%를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파토스는 열정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전하느냐에 따라 설득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설득에 30%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마지막은 로고스이다. 얼마나 논리적으로 전하느냐이다. 논리가 밑받침되어야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설득에 10% 영향을 미친다.

세 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영향력은 그 사람의 됨됨이이다. 인격이 중요하다. 평소의 삶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자산이다. 말과 논리를 가지고 설득하기보다 인격과 삶, 곧 사랑으로 설득하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 죄인을 설득하여 하나님 나라, 영생으로 이끌기 위해 채찍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셨다.

그 사랑이 우리를 설득하여 주께로 인도한다. 그 사랑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 그 사랑이 오늘을 살게 한다. 그 사랑이 내 삶에 흘러넘치길 소망한다. 그 사랑을 나누는 하루의 삶이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