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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9: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이 땅의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오실 것을 말씀하신다. 공의로 심판하시며 신자와 불신자를 명확하게 구별하시기 위해 오신다. 그런데 그 심판 주의 이름을 충신(성실)과 진실(11절), 하나님의 말씀(13절), 만왕의 왕 만주의 주(16절)이라 소개하는 데 12절에서는 예수 자신 밖에 아는 자가 없는 또 다른 이름 하나가 있다고 소개한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을 기록한 단어도 있지만 어떤 단어로 정하여 표현할 수 없는 이름도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 주님의 이름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신만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은 인격을 담고 있다. 한 존재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표현이기도 하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우리 안에 남겨 놓으셨다. 어렴풋하게라도 알 수 있다.

왜 이렇게 알게 하셨을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려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노력하여 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음을 깨우치시는 것이다. 갈수록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되고 인공지능(AI)이 사람에 의해 사람도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내다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피조물이고, 우리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보여주거나, 경험하게 해 주면 믿겠다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을 계시해 주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계시 안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보여주시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여주면 믿겠다가 아니라 믿고 나니 보이는 것이다.

순서가 뒤바뀌면 눈에 보이는 비정상적인 현상, 특별한 일들, 기적과 같은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려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삶을 꼼꼼히 살피면 성도의 일상은 기적의 연속이다.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 능력과 실력과 상관없이 실제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모든 일들은 우연이 그렇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배후에서 일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증거들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치 보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성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고 사는 사람이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손길을 열어 보여주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해 주시는 것들을 하나씩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오늘 그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 걷고 싶다. 그 믿음 위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늘 은혜만 넘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