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1:13)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악한 왕 아합의 뒤를 이은 아하시야 왕도 악한 길을 걷는다. 왕 위에 올랐지만, 특별히 무엇을 하기 전데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다락 난간에 앉았자 떨어질 수 있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좋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해야 하듯 자기의 앞날에 대해 궁금하다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어야 한다.
아하시야 왕은 달랐다. 하나님이 아니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나아가 묻는다. 어리석은 행동이다. 하나님이 이런 왕을 좋게 보실 리가 없다. 그래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다. 침상에 올라간 그가 내려오지 못하고 그 질병 때문에 죽는다고 말씀하신다. 화가 난 왕은 엘리야 잡고자 한다. 오십 부장과 오십 명의 군인을 보내었으나 두 번 실패했다.
세 번째 오십 부장과 오십 명의 군인을 다시 보낸다. 앞선 사람들의 실패를 보면서 세 번째 보냄을 받은 오십 부장은 다른 선택을 한다. 엘리야에게 내려오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 앞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긍휼을 구한다. 자신과 50명의 생명을 귀하여 보아주길 간구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것이다.
그는 생명의 주권자가 누군 줄 알았다. 왕이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이심을 믿었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은 이유이다. 그리고 은혜를 구했다. 자신과 50명의 생명을 살려달라는 것이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것이다.
그는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오직 은혜만 구한다. 교만하게 엘리야에게 명령하지 않았다. 겸손하게 은혜를 구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은 실패하는 지름길이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를 살피며 겸손하게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이 살리시면 살고, 하나님이 죽이고자 하시면 죽을 수밖에 없다. 불청객이라고 말하는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을 보면 다 동일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시기로 작정하면 아무리 발버둥을 치며 거부해도 생명을 지킬 수 없다. 하지만 세상 의료진들이 다 죽는다고 말해도 하나님이 살리시면 반드시 회복되고 일어난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면서도 우리는 어리석게 행동할 때가 있다. 다급한 일을 만나면 아하시야 왕처럼 세상의 방법을 찾는다. 먼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을 찾는다. 어리석은 행동이다.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세상의 그 누가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무더위가 계속되는 날씨다. 언제나 이 더위가 물러갈까 싶다. 하지만 때가 되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찬바람이 불어오게 하실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겸손하게 내어 주는 삶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말씀이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며 살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