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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신다. 들어가서 제일 먼저 만난 곳은 이방인의 뜰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장사하는 것을 보면서 결심하신다.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 성전에 물건을 가지고 지나지 못하게 하신다.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는 곳이 이방인의 뜰이다. 주님은 이방인의 뜰이 본래 목적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행동하신다. 목적 이외의 방법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내 쫓으시며, 청소하셨다.

주님은 이곳을 가리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만민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방인들이다. 유대인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이방인들이 누구인가? 소외된 사람들이다. 다문화 가족들이다. 사회적 약자들이다. 영적으로 아직 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건강하게 자리 잡고, 하나님을 만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며,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처음 예배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어색해 하지 않도록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만민이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인종을 넘어서 누구나 나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 무엇이 이렇게 변질시켰을까? 주님은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 책망하셨다. 강도는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가는 사람이다. 자기 것이 아닌데 물리적 힘을 사용하여 빼앗아 가는 것이다. 물리적 힘은 때로 권력으로, 때로 위협과 협박으로 나타난다. 전적으로 자신의 욕심,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이다.

당시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타락한 면이다. 자신들의 필요와 탐욕을 채우기 위해 이방인의 뜰을 변질시켰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장사터로 만들었다. 포장은 그럴듯하다.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준비하는 곳으로 규정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돕기 위함이라고 포장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의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배려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속마음을 보셨다.

다시 말씀으로부터 우리 교회를 생각하며 살펴본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누구나 나아가 기도할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제한적인 공간이 되었다. 언제 다시 일상을 회복하고 누구나 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 회복될지 예상이 안 된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진정 넉넉한 품을 가지고, 누구나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이 되도록… 탐욕을 내려놓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공간으로 드러나길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 가진 것도 아낌없이 내어 줄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