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9: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레위인과 그의 첩 이야기이다. 기브아의 한 노인의 집에 들어가서 대접을 받고 즐거워할 때 그 마을의 불량배들이 찾아온다. 레위인의 첩을 내놓으라 요청한다. 강제로 빼앗아 갔다. 밤새 여인을 욕보이고 새벽 미명에 놓아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
이 여인은 필사적으로 자신이 잠시 머물렀던 노인의 집을 찾아온다. 몸이 정상이 아니었고 생소한 땅이어서 어렵게 찾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집 문을 열기 위해 얼마나 문을 두들겼을까? 결국 문은 열리지 않고 여인은 문지방에 손을 얹은 채 죽었다.
필사적인 몸부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레위인은 밤새도록 곤히 잠을 잔다. 자기가 사랑해서 데려가기 위해 처가까지 가서 데리고 가는 아내이다. 불량배들이 여인을 끌고 갔는데 걱정도 되지 않았을까. 어떻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 처음부터 레위인에게 이 여인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욕정을 채우기 위한 대상인가?
정상적인 생각을 한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자기 필요와 욕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없다.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인 사랑만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는 혼란만 가득하고 아픔만 반복된다. 자기를 위해 이웃을 희생시키고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이 곧 나라고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이다.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성탄을 묵상하는 대림절 기간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이런 악함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부패한 본성을 새롭게 하여 이웃을 위한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성도는 구별되게 사는 사람이다. 구별되어야 할 영역이 여러 가지이다. 오늘은 나를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살기를 소망한다. 가정에서부터,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섬길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살피며 섬기길 원한다. 자기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조금이라도 본받아 따라가길 소망한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 하였다.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누군가 베풀고 돌아섰는데 더 주고 싶으면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다. 주고 또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의 두 손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부패하고 온통 자기만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