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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4: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기 위해 나홀성에 도착한다. 종은 쉬고도 싶고, 맡겨진 일을 먼저 해야겠다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은 모든 일을 뒤로하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분명 아브라함이 길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앞서 준비하실 것이라 축복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에 앞서 준비하시고 인도하는 하나님이다. 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미리 준비해 주심을 신뢰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약속의 장소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다.

가끔 우리는 이 본문을 오해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데 마음에 여러 가지 소원들을 다 아뢰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종이 이삭의 아내감에 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게 하리라” 말하는 것은 결코 조건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을 주시길 구한 것이 아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후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하는 증거를 구한 것이다.

당시 나그네 대접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나그네가 목말라 할 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다. 그러나 여인의 몸으로 열 마리 낙타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갈증을 느끼는 낙타는 100리터 정도의 물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면 거의 1톤에 가까운 물을 길러야 한다. 한두 번 물을 길러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평범하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확실한 증거로 이것을 구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분명한 것을 구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 동행하신다. 떠나신 적이 없다. 항상 함께 하신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성전 삼고 머무신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실을 소홀히 대하거나 무의미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알겠나이다’는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영적 민감함을 위해 구해야 한다. 매 순간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이끄시는 증거들을 주시는데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 편의 문제이다.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우리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며 일하신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그 손길을 느낄 수 있는 민감함이 있어야 한다. 그 손길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한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증거를 구하고, 그 증거를 볼 수 있는 안목이다.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하길 구한다. 그 은혜를 느끼며 경험함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굳게 서게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