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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서로를 비교할 때가 있다. 누가 더 나은지 이야기한다. 그런데 비교해 보면 거의 비슷하다.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 같은 존재이다. 조금 ‘더와 덜’의 차이는 있다. ‘도토리 키 재기’이다. 그러나 근본은 동일하다. ‘다 죄 아래’에 있다. 그래도 자주 비교하고, 나는 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다 같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 중에도 의인은 없다. 생각하는 것이 이기적이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중심적이다.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이타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면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행동할 때 의도가 숨겨져 있다. 마음속에 이기적인 마음이 있다. 반사 이익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순수한 동기의 선행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사람은 가만두면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진다.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생각 속에 만들어 낸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을 찾는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다른 도움의 손길을 기대한다.

선보다는 악을 좋아한다.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을 행함으로 기분도 좋아지고, 마음도 넉넉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데도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 아담 이후로 인간의 부패한 심성이 자연스럽게 선보다 악을 좋아하는 것이다. 악을 행하고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면 은밀한 쾌락을 느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된다.

선한 말보다는 악한 말을 더 좋아한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에 하나님 존재를 의식하고 사는 것이 경건하게 사는 길이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기 쉽다. 그냥 우리가 선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악한 말을 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린다”라는 사실을 의식해야 말이 바뀐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언어가 바뀌고 행동도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주심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이웃을 보면서 자신을 보라는 것이다. 이웃은 나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다. 이웃을 통해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다. 이웃을 볼 때 왜 이렇게 나쁘냐고 판단하지 말자. 거친 이웃을 보면서 그 모습이 내 모습임을 생각하며 나를 다듬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 자주 만나고, 자주 대화하면서 우리를 다듬어 가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다듬어 가자.

이웃과 만남에서 비교적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 오히려 이웃을 통해 더 낮아지자. 이웃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길 소망한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자비가 나의 모난 성품을 품어주시고, 다듬어 주셔서 하나님을 닮아 살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