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7: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나이가 들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가까운 것은 잘 보이지 않고 먼 것은 그나마 보이기에 원시라고 한다. 원시가 오면 불편한 것이 여러 가지이다. 특히 안경을 사용하던 사람은 다초점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두 개의 안경을 번갈아 가며 사용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멀리 그리고 넓게 보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그런데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운 것과 맏아들 에서를 불러 별미를 만들어 오라는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삭은 아들 에서에게 말한다.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별미를 만들어 오면 먹고 죽기 전에 마음껏 축복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삭은 젊은 날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바른 길을 걷기 위해 훈련받은 사람이다.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배웠다. 그런데 노년이 되어 눈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도 어두워졌다.
두 아들을 출산할 때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그렇게 신앙의 훈련을 받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애썼던 이삭이다. 아내를 맞이 할 때에도 묵상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였다. 그랄 목자들이 판 우물을 막고 떠나기를 요청할 때에도 조용히 떠났던 이삭이다. 주와 동행하고자 한 걸음씩 순종의 길을 걸었던 이삭이다. 그런 이삭이 나이들어 눈이 어두워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의 길을 걷고 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가정 안에 편애가 문제였을까? 노년에 이삭이 묵상을 소홀히 했을까? 대외적인 일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잘 처리했는데 가정의 일은 자기 생각대로 한 것일까?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불분명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이다. 육안만이 아니라 영안도 어두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떻게 우리들의 육안은 어두워져도 영안을 밝히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영안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사는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신앙의 기본기인 ‘말씀과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말씀 묵상이 깊어지는 것이다. 하루만 묵상을 쉬어도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 멀어지고 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본성이 말씀보다는 그냥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쉽고 편하게 생각한다. 신앙생활에서 아주 작은 허용이 결국은 전체를 잠식하는 것이다.
말씀은 신앙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부이다. 말씀이 무너지면 신앙이 근본적으로 뿌리부터 흔들리고 넘어진다. 잠시 이 세상의 삶을 위해서 육안도 어두워지지 않도록 의학의 도움을 받는다. 영안은 영원의 삶의 준비 하는데 꼭 필요한 안목이다. 육안보다 더 투자하고 관심을 갖고 관리해야 할 것이 영안이다. 영안을 밝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순종하며 살기를 소망한다. 조용히 손을 모아 기도한다. 주님!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