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반은 하나님이고 반은 인간이 아니다. 전적으로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셨다. 우리처럼 감정이 있으셨다. 그러면 무슨 일로 눈물을 흘리셨는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처럼 보인다. 우리를 슬프게 만들고 눈물을 자아내는 것은 죽음이다. 그런데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다. 나사로의 질병은 죽을 병이 아니었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하셨다. 그러나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함께 한 유대인들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 장사지냈다. 주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자 곧바로 고백한다.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 안타까워하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아서 오라버니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은근히 예수님을 탓하고 있다. 그 자리에 어떤 사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를 죽게 할 수는 없었느냐?” 은근한 불평을 한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에도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주님은 눈물을 흘리신다.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믿음 없음에 슬퍼하셨다. 주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함을 보며 슬퍼하신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예수님이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우리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기 원하신다. 지식적인 앎만이 아니라 그 지식을 토대로 바른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동하기를 원하신다.
오늘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은 어떤 감정을 표현하실까? 나에게도 그들처럼 “믿음 없음, 영적 무지함, 불신앙”이 있지는 않은가? 바르게 보고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그래서 하늘의 은혜를 구한다. 성령의 조명으로 밝히 보고 따르길 소망한다. 말씀을 안에 머물고,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넉넉한 은혜를 부어주시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