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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요 18:31)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이 잡혀 오신 것을 알았다.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을 벌하는 것보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처리하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한다. 유약한 행동을 한다. 자기가 가진 권한 행사를 회피한다. 지도자로서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비겁한 행동이다.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하며 의로운 사람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나라마다 정한 법이 있다. 로마의 법과 유대인의 법이 있다. 이 세상의 법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의 법이 있다. 각각의 기준에 따라 판결하면 된다. 그래서 빌라도는 처형하고 싶다면 유대인의 법대로 처리하라고 요청한다. 빌라도의 비겁함이 묻어난다.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했다면 자신이 가진 권리와 권한으로 행하면 된다. 그런데 회피한다. 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판단했다면 더 이상 유대인들도 어떠한 말도 못 했을 것이다.

회피하고 우물쭈물하니 오히려 유대인들은 더 강하게 나온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한다. 사형 선고를 내려 달라는 요청이다. 법의 기준에 따라 정확하게 판단하기 전 먼저 사형을 내려달라는 요청이다. 정확하게 살펴보면 유대인들에게도 사형 선고를 할 법이 있었다. 신성모독과 몇몇 범죄에 대해서는 돌로 쳐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할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신성모독으로 몰아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정당한 판단에 의한 형벌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에 따른 정치적 판결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속마음은 빼앗긴 인기를 되찾고 평소처럼 탐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예수님을 처형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와 로마의 힘을 빌려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어설프게 대하고 회피적 반응을 보이면 이처럼 더 강하게 다가온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위협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에게 세상의 논리를 따라 살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넘지 말아야 하는 분명한 선이 있다. 믿음의 도리이다. 하나님 백성의 삶이다. 말씀이 가르쳐주는 길,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다.

성도가 우물쭈물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비결은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진리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성령님은 주님의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 말씀이 생각나게 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갈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오늘 하루의 삶이 주와 함께 성령의 힘을 덧입어 걸어가는 믿음의 길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