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2: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기도의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반드시 드러나는 신앙적 증거이다. 기도는 우리 영혼이 살아났다는 증거이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다. 호흡하지 않는 사람이 죽은 사람인 것처럼 영적인 호흡인 기도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다. 거듭난 새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호흡이 있다. 심장이 박동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행하기 위해 기도하게 되어 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새 새명을 얻은 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 중 한 가지가 기도이다.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 무엇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했는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우리를 위해 지금 행하시는 일인지 깨닫고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이다. 내가 필요한 것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전달하고, 하나님이 그 기도의 내용들을 다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이야기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일방적인 의사 전달이 아니라 쌍방 의사소통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영적 호흡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누구에게 기도하며,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그 기도의 대상은 자신이 신으로 여기는 존재이며, 자기 필요를 위해 기도한다. 그래서 다급한 일이 생기고, 집안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누구나 자기가 믿는 신에게 나아가 기도한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기도한다고 응답되는 것은 아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기도해도 여전히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공격하는 사람이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에도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하나님께 바른 기도 생활을 했다면 이런 삶을 멈췄을 것이다. 교회를 훼방하고 핍박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스데반의 죽이는 일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삶을 살도록 내 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도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
기도 생활을 했지만 자신의 종교적 열심과 자신의 필요를 위해 한 것이다. 어느 종교에나 기도가 있다. 문제는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이다.
바른 기도 생활을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만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새 생명이 새 호흡이 필요한데 그 새 호흡이 바로 기도이다. 영적 호흡이다. 성도에게 기도는 생명줄이다. 기도는 하루를 살아가는 에너지 공급원이다. 기도는 능력 있는 삶을 사는 비결이다. 기도 없이 내 생각과 경험으로 살면 넘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위험을 잘 피했다 하여도 오래갈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이다. 진심을 통하는 대화를 통해 내가 누군지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도는 매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삶의 방향이 결정되며 내 삶을 이웃에게 내어드리게 한다. 나에게도 이런 기도 생활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 생활을 점검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회복되고, 하나님 사람답게 살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