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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성도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사라지고, 인간의 부패한 모습만 드러난다. 성도가 머물 곳은 ‘그리스도 안’이다. 주님 품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며,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여 설명한다. 우리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아담은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왔다. 영생의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고, 풍성한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생의 삶, 하늘의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아담 안에 머물 수도 있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 수도 있다. 안에 머문다는 것은 연합의 의미가 있다. 하나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와 연합을 하면 연합한 그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 아담과 연합하면 죽음을,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삶을 얻는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누구의 영향을 받으며, 어떤 사고를 하느냐를 결정한다.

대표성의 원리도 동일하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범죄 함으로 그 후손들에게 죄가 전가되었듯이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부활이 전가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서 있기를 결정하는 것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의 갈림길이다.

오늘 하루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누구와 연합한 삶을 살고 있는가?’ 매 순간 이 질문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스스로 답하며 살기를 원한다.

가끔은 둘 다 붙잡고 싶을 때가 있다. 아담처럼 살고 싶기도 하고,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기도 하다. 아니 많은 경우 아담처럼 살아간다. 그래도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그리스도 편에 서 있다. 분명한 것은 중간이 없다는 사실이다. 양다리를 걸칠 수도 없고, 회색지대와 같은 중간에 머물 수도 없다. 그리고 예외가 없다. ‘모든’ 사람이라 하였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아담이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산다. 예외가 없다면 선택과 결과도 예외가 없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든지 영원한 사망을 향한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오늘도 조용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본다. 내 열심과 노력으로 사는 삶이 아니다. 내가 어디 서 있느냐, 누구의 영향을 받으며,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이다. 내면의 자아가 갈등할 때, 선택의 고민이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리스도의 연합한 삶을 소망한다. 악한 동무들처럼 선한 행실을 더럽히지 않고, 깨어 의를 행하며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살고 싶다. 부끄럽지 않은 삶, 날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